허효정의 인문학 리사이틀 I '숭고의 파노라마' 를 듣고 2019년 2월 13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허효정의 인문학적 레가토: 호흡과 색, 함축적 의미를 끌어안은 따스함"
피아니스트 허효정씨를 알게 된 건 아마도 2011년이나 2012년이 아닌가 싶다. 박사학위 렉처 리사이틀로 내 코랄판타지 1번을 연주하고 논문으로 연구해보고 싶다 연락해 왔고, 그 이후로 미국과 유럽 순회연주와 음반 발매 등으로 나는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오고 있다. 내가 효정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결혼한지 몇 달 안된 신혼 초기였는데 그 사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한국에 정착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효정씨 또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피아노곡은 코랄판타지만 계속 쓰리라 결심하게 된 건 아마도 효정씨 때문이지 싶다. 그녀는 45분이나 되는 이 어려운 대곡을 모두 외우고 모든 피겨레이션을 선명히 그려내고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을 소중히 퍼 올려 활자로만 그려진 코랄판타지 1번에 소리와 생기를 불어넣어 미국과 유럽, 한국의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그녀 덕분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치고 코랄판타지의 후속 넘버를 기대하게 되었으니 효정씨가 코랄판타지에 쏟은 정성이 작곡가인 내게 얼마나 많은 격려와 영감과 응원을 준 것인지! 이러한 격려로 나는 코랄판타지라는 피아노 장르를 계속해서 써 나갈 동기와 힘을 얻는다.
지난 2월 13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허효정의 인문학 리사이틀은 그간 내가 지켜본 허효정의 음악과 학문, 사람됨, 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느끼고 그가 어떤 새로운 문을 열고 첫 발걸음을 내딛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허효정은 서울대에서 피아노와 미학을 같이 공부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하고, 인디애나와 위스컨신대학에서 피아노와 합창지휘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서는 서울대학에서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는데 이것만 보면 그녀가 혹시 학위 컬렉터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전공 분야만 미학, 피아노, 합창지휘, 종교음악, 음악학 다섯 분야고 이 중 피아노는 이미 박사학위를, 음악학은 곧 박사학위과정을 마칠 터이니 대단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녀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할 때 그리고 음악학을 다시 공부하기로 결정했을때의 고민을 지켜보았기에, 인문학 리사이틀 I 을 보면서 그녀가 왜 이렇게 긴긴 여정을 돌고 돌아 두 아이의 엄마로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음악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생으로 버거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민과 힘든 여정이 없었다면 이 날 허효정이 보여준 "숭고"라는 주제를 토크와 피아노로 그와 같이 풀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주제가 있는 렉처 리사이틀은 흔히 어느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는 기획이다. 그러나 허효정이 풀어낸 "숭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이를 실제 음악 작품 연주로 동시에 풀어낸다는 것은 그녀의 음악과 학문을 향한 오랜 항해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13일 리사이틀에서는 클래식음악의 개념형성과 근대철학의 숭고담론, 롱기누스, 버크, 칸트의 숭고이론과 클래식음악의 어법간 연관성, 후밀리스 엣 수블리미스, 칸트 이후의 담론과 클래식 음악의 정체성 등이 다루어졌다. 40여분이 넘는 시간을 쉽지 않은 이 주제에 대한 토크로 할애하면서 허효정은 얇고 피상적인 접근이 아닌, 클래식 음악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속에서 발견한 "숭고"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그녀가 보낸 시간과 고민의 깊이, 그리고 진정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절제된 언어와 제스처, 철학과 클래식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선명하게 만든 PPT,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45분 길이의 내 코랄판타지를 모두 암보로 연주했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허효정은 때론 미련할 정도로 사전 준비와 정확성을 기하는 연주자이다. 짧은 프레이징과 페달의 사용법에도 매우 꼼꼼하다. 나는 그녀가 인문학과 음악이 결합된 강의나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교육 프로그램 등을 훌륭하게 진행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피아노로 소리를 연마함과 동시에 앞으로 폭넓게 오래 깊이 공부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인문학 음악 강좌와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토크는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상대방을 어려운 주제로 윽박지르지 않고도 편안하고 듣기 쉽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졌다.
합창지휘를 전공한 그녀의 이력은 나의 코랄판타지 5번 '팔복-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연주할 때 제대로 발휘되었다. 나는 그녀와 연주 전에 아주 짧은 리허설을 한 번 가졌다. 워낙 같이 오래 작업 했고 또 효정씨가 원하던 주제를 효정씨의 칼라에 맞게 작곡했기에 잘 하리라 생각했다. "허효정의 인문학적 레가토: 호흡과 색, 함축적 의미를 끌어안은 따스함” 나는 코랄판타지 5번 '팔복' 에 대한 그녀의 연주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후 대화를 통해 그녀가 합창 지휘를 하는 것 같이 이 곡을 연습했다는 말을 듣고서 그날의 의문이 풀렸다.
허효정의 인문학 리사이틀은 피아니스트 허효정의 피아노 독주회가 아니다. 그녀는 인문학과 음악을 연결하고, 일반관객과 전문가를 연결하고, 마음이 가난한 자와 하늘을 연결하고, 이를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담아내는, 피아니스트의 옷을 입은 인문학 리사이틀의 기획자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 이 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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