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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hinuh Lee

[기사] 서랍 속에 방치되지 않을 창작곡

Updated: Aug 20, 2020



현대음악의 많은 창작곡은 초연만으로 생을 마감한다. 절대적인 적막 안에서 골몰하는 작곡 과정과 악기의 실제적 울림을 조율하는 치열한 리허설을 통해서야 겨우 무대에 오를 수 있는데도, 수많은 악보가 초연 이후 곧 서랍 안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대신 콘서트홀을 장악하며 비일비재 연주되는 곡들은 여전히 베토벤과 브람스 등의 작품이다. 이런 애석한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음악회가 있었다. 초연 이후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은 명곡들, 서랍 안에 갇혀 있던 악보들이 일제히 빛으로 탈출한 각별한 음악회였다.


음악회를 기획한 작곡가 최우정은 그 의미를 이렇게 통찰했다. “한국 현대음악의 오래된 명곡들이 면면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신작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 지키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음악회는 TIMF 앙상블이 연주한 ‘사운드 온 디 에지’(Sound on the Edge) 시리즈의 4번째 공연이었다. 특히 한국의 전통예술로부터 영감받은 작품들로 구성했는데, 서양음악 일색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뼈저린 고뇌가 느껴졌다.


첫 곡은 오보에와 타악기를 위한 김무섭의 2중주로 시작되었다. 본디 거대한 굉음에 익숙한 심벌즈를 말총 활과 부드러운 맬릿으로 어루만져 신비로운 울림을 일으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보에 역시 태평소의 음색과 청각적 인상의 접점을 찾아내면서 풍성한 여백을 품고 있었다. 한편 이만방의 현악4중주 아미타(阿彌陀)는 한국의 토속신앙에서 음악적 주제를 탐색했던 작곡가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초혼부터 망혼례까지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의식을 악장별로 따르면서도 아방가르드의 실험적 사운드가 대담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현악기의 거의 모든 테크닉이 총망라되었다시피 난해한 곡인데다 연주시간은 장장 30분에 달한다. 현대음악 창작에서 연주자의 역할은 얼마나 핵심적인가. 이 무대를 위해 사투를 벌였을 치열한 리허설 현장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작곡가 백병동의 ‘별곡87’은 1987년에 작곡되어 30년 만에 깨어난 작품이다. 작곡가는 프로그램 노트를 다시 적는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1987년 역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어두운 정치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당시 뒤틀린 심정을 토로했던 이 작품을 촛불의 물결이 일렁이는 시대에 다시 연주한다.” 작가는 어떠한 발언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반문했다는 이 곡은 서랍 속에서 정지되었던 30년을 되살리며 사무치게 울려 퍼졌다. 한편, 작곡가 강석희의 부루는 소프라노가 무녀의 역할을 도맡아 신라시대 무속의식을 재생했다. 여인의 노래는 가사의 구체적인 구속에서 해방된 채 선율의 굴곡만으로도 영적인 영역을 일깨운다. 마치 청명한 물소리를 연상시키는 타악기의 특징적 음색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청각적 기억을 새겨놓았다.

이신우의 보태평 역시 초연 이후 20년 만에야 깨어난 곡이다. 국립극장에서 무대에 오를 당시엔 관악기인 파곳이 보태평 선율을 연주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소리꾼이 종묘제례악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해 당당하고 힘찬 에너지를 뿜어냈다. 국악기인 박을 치며 악상을 주도해가는 악장의 역할이 초연 당시엔 어떻게 다른 악기로 대체될 수 있었단 말인가. 첫 무대의 결핍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이번 연주는 필연적인 재탄생이 아닐 수 없다.


고백하건대, 창작곡으로 연주회를 흥행시키기 어렵다는 비틀린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연주자 입장에선 새롭고 낯선 악상에 설득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주할 만한 창작곡이 없다고 투정도 부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겠다. 단지 찾아서 연주하지 않았을 뿐, 서랍 속에 갇혀 있는 명곡들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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