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교수의 음악이야기 <12> 한국인 음악가들로 되살아나는 순교자의 심장
“야소... 야소...”(예수, 예수) 조선 병사에게 품속에 있던 성경책을 꺼내어 건넨 그는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모국어로 토해 낸 그의 한 마디... “Fy gwerthfawr, Caru chi yn fwy nag erioed yn fwy” (My precious, love you more than ever more, 나의 귀한 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가상의 오페라 ‘레드북’의 아리아 <들으소서 나의 사랑하는 자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웨일즈의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다룬 아리아. 이 작품은 런던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National Opera Studio)의 프로젝트 12:42의 일환으로 한국인 바리톤, 한국인 대본작가, 한국인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코로나19 전세계 팬데믹의 한복판, 모든 문이 닫히고 삶이 정지된, 적막이 흐르던 영국 땅에서.
지난 2월, 비 오는 어느 날, 런던 유스턴역. 올해 초 영국 방문 후 귀국 직전 극적으로 성사된 NOS 디렉터 데이비드 설킨(David Sulkin)과의 만남... 순교자의 심장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인연으로 한국인 음악가들의 품에 들어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토마스 선교사의 생애가 우리 팀의 주요 관심사였던 건 아니었다. 아리아에서 무엇을 다룰지 몇몇 소재를 놓고 여러 차례 팀 내 화상 회의를 거쳤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대본작가로 참여한 고은이 피아니스트가 품고 있었던 웨일즈와 토마스에 대한 생각에 작곡가와 성악가가 공감하고, 데이비드 설킨과 어드바이저 루스 마리너(Ruth Mariner) 모두 동의하면서 그렇게 이 아리아는 시작되었다.
토마스의 일인칭 시점에서 영어, 웨일즈어, 한국어로 쓰여진 고은이의 대본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열강들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 땅과 영혼들에 대한 토마스의 안타까운 마음, 중국 땅에서 잃은 신혼의 아내 캐롤라인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 웨일즈 아버가버니 언덕에서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자 외롭고 고단했던 의의 삶을 끝까지 경주했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마지막 부분.
단 9분의 짧은 아리아를 위해 한 사람의 숭고했던 인생과 순교의 마지막 순간을 은유와 상징을 통해 함축적이고 밀도 있게 그려낸 대본이었기에, 필자 역시 대본의 의미와 결을 살려 토마스 선교사의 인간적 아픔과 고독, 하나님과 영혼을 향한 그의 헌신된 사랑을 최대한 음악으로 울림 있게 담아보고자 하였다. 아리아는 그렇게 완성되었고 바리톤 최성규의 노래와 메이리 그레워(Mairi Grewar)의 피아노로 영상 녹화되어 유럽의 오페라 플랫폼 오페라비전 사이트에서 올해 11월 17일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작품을 쓰는 내내 몇 가지 생각이 마음에 맴돌았다. 아내를 잃은 불행 속에서도 서방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고 힘없던 나라 조선을 향해 무엇이 그를 계속 나아가게 했을까. 조선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웨일즈의 한 청년을 머나먼 이국땅까지 이끌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리아는 끝났지만 필자는 아직도 토마스 선교사를 주제로 내년 예정된 음반 녹음을 위한 새 작품을 쓰고 있다. 그리고 고은이 피아니스트는 토마스 선교사가 목사 안수를 받았던 웨일즈 하노버교회와 영국에서 이 아리아 연주와 음악회를 구상하고 있다.
라노버의 꽃향기, 수선화 흐드러진 아버가버니의 언덕으로부터 천국을 향해 조선 땅을 품었던 토마스 선교사... 이제는 그를 통해 조선 땅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음악에 담아 다시 웨일즈 땅을 축복하고 싶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엡 6:19)
출처 : 한국기독공보 http://www.pckworld.com/mai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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